2008년 10월 07일
중국과 일본이 ‘마쓰모토로’의 역사적 지혜를 찾다
中日尋找松本樓歷史智慧
마오펑(毛峰)
『亞洲週刊』 22卷 19期, 2008년 5월 18일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일본 총리는 마쓰모토로(松本樓)에서 개인적으로 연회를 열어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을 초대하였다. 그는 거기서 우메야 쇼키치(梅屋莊吉)가 손중산(孫中山)의 혁명을 재정적으로 원조하고 또 우메야 가족이 대대로 중일우호를 위해 진력하였던 지난 일들을 들추어내었다. 마쓰모토로는 손중산과 쑹칭링 생전의 친필과 유물들을 많이 보관하고 있다. 그곳은 중국민주혁명의 무대 중 하나였다.
손중산(孫中山)이 추숭하였던 중일 간의 친선이 중일 양국 정상 간에 새로운 불꽃을 발화시켰다. 손중산과 일본의 ‘결맹형제’인 우메야 쇼키치(梅屋莊吉)가 속마음을 터놓고 교류하였던 일화가 중일 정상 사이에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의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은 5월 6일부터 5일 간의 일본 국빈방문을 시작하였다. 일본의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총리는 그날 저녁에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도쿄의 마쓰모토로(松本樓)에서 개인적으로 연회를 베풀어 ‘먼 곳에서 온 벗’을 극진히 대접하였다. 중일의 지도자들은 마스모토로의 아름다운 역사적 기억을 ‘음미하면서’ 개인적인 우의를 다지고, 영감(靈感)을 가지며, 중일 간의 전략적 호혜관계의 새로운 여정을 열었다.
후진타오가 탄 전세기는 6일 오후에 도쿄 하네다공항에 착륙하였다. 고무라 마사히코(高村正彦) 일본 외상과 추이톈카이(崔天凱) 주일중국대사 및 재일화교대표들이 공항에서 후진타오의 방문을 영접하였다. 그 후 후진타오는 숙소인 신오오타니(新大谷)호텔에서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 등 일군의 일본인들과 회견을 하였다. 저녁 7시 반에 후진타오는 녹음이 우거진 마쓰모토로로 가서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가 개인적으로 주최한 만찬에 참석하였다. 후진타오와 후쿠다 야스오는 마쓰모토로의 경영자와 우메야 쇼키치의 외손녀인 코사카(小阪主和子)의 인도 하에 2층에 특별히 설치된 「손중산 및 우메야 쇼키치 자료실」로 올라가서 손중산의 ‘맹우(盟友)’ 우메야 쇼키치가 사재를 털어서 손중산이 제제(帝制)를 타도하고 민국(民國)을 건설하며 공화(共和)로 전진하도록 도와준 것과 관련된 진귀한 사료들을 관람하였다. 이들은 또 손중산와 쑹칭링(宋慶齡)이 ‘연인에서 가족이 되기까지’ 우메야 쇼키치 부부가 행한 역할에 대한 역사적 일화 및 우메야 가족이 중일 간의 친선과 우호를 위하여 대대로 노력을 기울였던 지난 일들을 알게 되었다. 관람 도중 후진타오는 손중산이 우메야에게 직접 써 준 ‘현모(賢母)’와 ‘동인(同仁)’이라는 유물 앞에서 한참 동안 발걸음을 멈추고 마치 생각에 잠긴 듯 행동하였다. 후진타오는 관람을 마친 뒤에 흔쾌히 붓을 들어 ‘중일 간의 우호는 대대로 전해질 것이다.[中日友好,世世代代]’라는 글을 써주었다.
마쓰모토로는 도쿄시 중심의 히비야(日比谷)공원 안에 위치하며 사방이 푸른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새소리와 꽃향기가 어우러지는 곳이다. 창업한 지 100여 년이 된 이 식당은 일본 메이지유신 이후 최초로 정통서양요리를 제공한 고급식당이며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좋아하는 만남의 장소였다. 마쓰모토로는 또 일본에서 중국민주혁명에 종사한 사람들의 무대로서 중국근대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우메야 쇼키치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 친구들이 전력을 다하여 손중산이 삼민주의(三民主義)의 이상을 실현하도록 도와주었다.
일본 총리인 후쿠다 야스오가 중국지도자를 접대하기 위하여 이곳을 선택한 까닭은 후쿠다 부부와 마쓰모토로와의 특별한 관계도 관련이 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마쓰모토로는 후쿠다 야스오의 부친인 전 일본 총리 후쿠다 다케오(福田糾夫)의 결혼기념장소이며, 장자인 후쿠다 야스오를 탄생시켜 일본 유일의 부자 양대 총리의 꿈을 실현시켰던 출발지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에 마쓰모토로는 또한 후쿠다의 부인 기요코(貴代子) 여사가 지인들을 초대할 때 가장 애용하는 장소이다. 그녀는 늘 이곳에 들려 지인들과 식사를 하며 환담을 나눈다. 이처럼 농후한 ‘중국연(中國緣)’과 ‘후쿠다연[福田緣]’이 서로 융합되어 이번 후진타오를 환영하는 개인적 연회는 시종 온화하고 느긋하고 유쾌한 분위기가 충만하였다.
지나간 일들은 결코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비록 손중산, 쑹칭링과 우메야 쇼키치 부부와 관련된 역사적 진상이 먼지투성이가 된 지 오래되었지만, 마쓰모토로의 상무이사와 우메야 쇼키치의 외증손녀 코사카 후미노(小阪文乃)는 그것에 대하여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아주주간』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이 부분의 역사가 오랫동안 ‘비밀을 유지하였던’ 이유는, 증조부 우메야 쇼키치가 임종 시에 “나의 친구는 중국혁명의 전부이므로 모두 손중산과의 맹약을 굳게 지켜야 한다.” “따라서 그와 관련된 일기나 편지 등을 절대로 외부에 알리지 말라.”라고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우메야 쇼키치의 유일한 딸이자 코사카 후미노의 할머니인 우메야 지세코(梅屋千勢子)는 줄곧 비밀을 유지하였다. 코사카 후미노의 어머니와 코사카 후미노가 그것을 물려받아 정리한 뒤에야 차츰 진귀한 사료가 공개되었는데, 그것들은 중일 양측의 진실을 구명하는데 도움이 되고, 또 중일 간의 우호와 이해를 증진시키는데도 도움이 되고 있다. 그래서 근년에 그들은 일부 사료를 계속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이번에 후진타오 주석의 마쓰모토로 방문을 환영하기 위하여 그들은 50 건의 자료와 유물들을 세심하게 선정하여 특별전에 제공하였다. 그 가운데 일부 손중산과 쑹칭링의 친필유물은 처음으로 외부에 공개되는 것이다. 코사카 후미노는 “나는 증조부와 정확하게 100살 차이가 난다. 100년 역사의 진상을 중국과 일본의 민중들이 함께 향유하여 역사적 지혜 속에서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1868에 출생한 우메야 쇼키치는 일본의 민간 실업가이자 또한 일본 최초의 영화회사인 ‘니카츠(日活)’의 설립자이다. 1895년 1월에 그는 손중산과 홍콩에서 교분을 맺었다. 두 사람은 첫 만남에서 의기상투하여 천하대사에 관하여 논의하였는데, 서로의 의견이 약속이나 한 듯 일치함을 발견하였다. ‘중일의 친선과 동양의 흥륭 및 인류의 평등’에 대하여 언급할 때는 더욱 마음이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맹우(盟友)의 교분을 맺었다. 손중산이 중국을 구하기 위하여 혁명을 일으켜서 청조(淸朝)를 타도하고 민주공화국을 건립하려는 이상을 실현하려고 준비할 때, 우메야 쇼키치는 ‘만약 그대가 군사를 일으킨다면 내가 재정적으로 돕겠다.’고 흔쾌하게 승낙하였다. 이후 우메야 쇼키치는 사실상 손중산이 영도하는 민주혁명의 가장 유력한 추종자이자 손중산 혁명의 명실상부한 ‘재무대신’이 되었다.
우메야 쇼키치는 광주기의(廣州起義)를 준비하기 위하여 재빨리 자금을 모집하여 기의군(起義軍)에 무기를 구매하여 주었다. 광주기의가 실패한 뒤에 손중산이 해외로 망명하여 계속적으로 혁명을 위하여 분투할 때, 그는 줄곧 우메야 쇼키치의 아낌없는 재정적 원조를 받았다. 무창기의(武昌起義)가 발발한 뒤에 우메야 쇼키치는 빚을 지면서까지 자금을 지원하여 의료대(醫療隊)를 조직하여 중국으로 달려가 혁명군의 전장에서 구호활동을 펼쳤다. 또 그는 촬영사 적옥견장(狄屋堅藏)을 파견하여 현장에서 무창기의의 전투장면을 촬영하도록 하였으며, 그것을 기록영화로 만들어 진귀한 역사자료를 남겨주었다. 그밖에 그는 거금을 연척하여 1861년(?)에 손중산을 위하여 일본 시가현(滋賀縣)에 중국 제일소(第一所) 비행학교를 창설하였다.
코사카 후미노가 『아주주간』에 알려준 바에 따르면, 손중산의 민주·자유·박애의 혁명이상을 추종하고 인정한 것이 우메야 쇼키치 인생의 최대의 전환점이며, 또한 그가 포부를 굽히지 않고 모든 재산을 아낌없이 손중산이 혁명을 실현하고 민국을 창립하려는 데 쏟아 부은 근본원인이라고 한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거하면 우메야 쇼키치가 중국혁명에 투입한 자금총액을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2억 엔(약 192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손중산은 생전에 친필로 ‘동인(同仁)’이라는 편액을 써서 우메야 쇼키치에게 주었으며, 동시에 우메야 쇼키치가 즐겨 입던 일본 전통의복에 크게 ‘현모(賢母)’라는 두 글자를 써주어, 우메야 쇼키치 부부가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중국민주혁명을 지원해주었으며,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자신과 쑹칭링을 보살펴준 점을 칭송하였다. 1929년 6월 1일에 손중산의 영구를 봉안하는 의식이 난징(南京)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우메야 쇼키치는 ‘친척’의 자격으로 쑹칭링 등과 함께 5월 26일에 영구를 호송하여 남쪽으로 내려갔으며 그 후 쑹칭링 등과 함께 중산릉(中山陵)으로 영구를 옮겼다.
우메야 부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쑹칭링 만년의 가장 아름답고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줄곧 남아 있었다. 이는 단지 쑹칭링이 일본이 우거할 때 우메야 부부로부터 받은 세심한 보살핌 때문만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메야 부부가 여러 가지 어려움과 반대를 이겨내고 그녀와 손중산이 결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도쿄 마쓰모토로의 응접실에는 쑹칭링이 사용하던 피아노가 아직까지 진열되어 있다. 이것은 1907년 일본 야마하음악회사가 제조한 제1 세대 피아노로, 피아노 건반은 상아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종류의 피아노는 전 일본에서 겨우 두 대만 남아 있으며 그 가운데 이것은 쑹칭링과의 연고 때문에 더욱 진귀하다.
코사카 후미노는 쑹칭링과 손중산의 비화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쑹칭링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13년 8월에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그녀의 아버지 쑹야오루(宋耀如: 일명 쑹자수(宋嘉樹))는 원래 손중산의 영문비서를 맡고 있었으나 신장병이 악화되어 큰딸인 쑹아이링(宋靄齡)에게 대신 그 일을 맡겼다. 그래서 쑹아이링은 늘 손중산의 거처에 출입하였다. 이듬해 9월에 쑹아이링은 상하이로 돌아와서 쿵샹시(孔祥熙)와 결혼하였고, 쑹칭링이 그 뒤를 이어 손중산의 비서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녀는 늘 손중산을 따라 우메야 부부의 집을 드나들면서 많은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다. 손중산과 쑹칭링이 서로 사랑하게 된 뒤에는 여러 방면의 반대에 부딪혔다. 코사카 후미노의 증조모도 처음에는 그들의 나이차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손중산은 우메야 부부에게 쑹칭링을 사랑한다고 토로하였으며 아울러 “나는 반드시 쑹칭링과 결혼하겠다.”라고 말하였다. 한편 손중산을 깊이 연모하던 쑹칭링도 집안의 강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우메야 부부가 손중산과 쑹칭링의 결혼을 성사시키다
1915년에 쑹칭링이 잠시 상하이로 돌아갈 때 우메야 부부는 그녀를 요코하마 부두에서 전송하면서 가능하면 빨리 돌아오라고 부탁하였다. 같은 해 9월에 손중산이 그의 부인 루무전(盧慕貞)과 도쿄에서 협의이혼한 뒤에 우메야 부부는 은밀히 천치메이(陳其美) 등과 상의하고 속히 상해로 사람을 보내 쑹칭링을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쑹칭링도 보모의 도움을 받아 ‘쑹씨 집에서 도망치는’데 성공하여 같은 해 10월 24일 도쿄에 도착하였다. 25일에 손중산과 쑹칭링은 일본의 저명한 변호사인 와다(和田瑞)에게 결혼등기수속과 혼인서약서의 감정을 부탁하였으며 뒤이어 우메야의 집에서 공개결혼식을 치렀다. 쑹칭링의 혼수품은 모두 우메야 부인이 보내주었다. 결혼식 때 손중산과 쑹칭링은 각각 우메야 부부와 의형제, 의자매의 결의를 맺었다. 손중산과 우메야 쇼키치는 함께 “중국에 진정한 공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아시아의 부흥을 위하여, 생사를 같이하고 환란을 함께 하겠다.”고 맹서하였다. 결혼한 뒤에 손중산과 쑹칭링은 우메야가 마련해 준 신혼집으로 이사하였다. 따라서 우메야 부부와 손중산 부부는 항상 내왕하였으며 그들 사이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 졌다.
세월은 흘러도 우정은 식지 않는다. 1978년, 쑹칭링은 랴오청즈(廖承志)에 부탁하여 우메야 부부의 딸 지세코(千勢子)에게 초청장을 보내어 ‘건강할 때 한 번 만나보기를’ 희망하였다. 그해 10월에 지세코 부부는 베이징으로 와서 쑹칭링을 방문하였다. 50 세가 넘은 지세코와 86 세의 쑹칭링은 뜨겁게 포옹하며 감격해 마지않았다. 쑹칭링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너의 부모님들은 내가 매우 그리워하는 사람들이다. 절대로 잊지 못할 중요한 사람들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쑹칭링은 또 직접 지세코 부부에게 편지를 써서, “너희들의 방문은 지난날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 추억이란 우메야 쇼키치 선생 부부와 손중산 선생과 나 사이의 우정의 추억이다. 시간과 상황이 아무리 바뀌어도 이 중요한 우정을 없앨 수 없다. 어떠한 것도 그것을 없앨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수 없다[不能]’는 글자에 밑줄을 그어 강조를 하였다.
코사카 후미노는 『아주주간』에 이렇게 말하였다. “이번에 우리는 후진타오 주석에게 쑹칭링의 친필 편지를 보여드렸으며, 또 우메야 쇼키치가 당시의 일본외상 히로타 고키(廣田弘毅)에게 보낸 친필도 보여드렸습니다. 거기에는 ‘중일 간의 친선을 실현하는 것은 나의 오랜 숙원이며 또한 나의 친구 손중산의 유언이기도 합니다. 중국과 일본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고민해야 합니다.’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바로 후진타오 주석이 우리에게 써주신 ‘중일 간의 우호는 대대로 전해질 것이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메야 가족이 굳은 의지로 변함없이 노력하는 목표입니다.”
# by | 2008/10/07 15:18 | 동아시아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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