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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속의 한국과 훈시옌 ‘개발독재’

못다한 캄보디아 이야기:

캄보디아 속의 한국과 훈시옌 개발독재

 

                                                       신 윤 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서남포럼 운영위원) 

 

이번부터 버마(미얀마) 역사 연재를 시작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머리 속을 계속 맴도는 캄보디아 이야기가 아직도 남아 있어 그냥 지나치기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다름아닌 캄보디아 속의 한국과 한국인 이야기이다.  최근 10년도 안된 사이에 양국 관계가 갑자기 가까워지면서 골치거리, 걱정거리가 자주 생겨난 까닭도 있고, 또 이 나라 지도자 훈시옌(Hun Sen)의 행적을 보노라면 박정희 대통령이 자꾸만 떠오르기도 하여, 꼭 한번 양국 간의 관계를 따져보고 내 나름대로 비교도 해 보고 싶던 터이다.

 

재작년 그러니까 2006 11월 말, 6년 만에 다시 앙코르 유적지가 있는 소도시 시엠리업(Siem Reap)을 찾았다가 갑자기 변한 거리 모습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흔히들 에어포트로드(airport road)라 부르는 공항에서 시내에 이르는 4km의 도로변을 따라 이전에는 단 하나도 없던 한국어 간판이 늘려 있었기 때문이다. 식당, 술집, 마사지, 호텔, 슈퍼마켓, 선물가게, 심지어는 <평양랭면>이란 상호의 북한식당까지, 현지어 문자인 크메르(Khmer)어와 세계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로마자를 제외하면, 한글이 시야를 가득 채웠던 것이다.  한자나 일본어로 된 간판은 눈을 닦고 찾아 봐도 보이지 않았다.  불과 몇 년 만에 어떻게 이렇게도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동남아 어느 곳을 가 보아도 양상이 비슷하지만, 그 나라의 수도라는 곳은 어디든 한국 사람들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  대체로 동아시아의 경제위기가 끝난 2000년대 초반에 시작된 현상이다.  경제위기 이전부터 한국인들이 많이 살던 방콕, 자카르타, 마닐라는 물론이고 새로운 한인 이주 도시로 떠 오른 호치민시 모두 교민수가 각각 5만 명을 훌쩍 넘어섰고, 과거 불과 수백 명의 한국인들이 살던 콸라룸푸르, 싱가포르, 프놈펜도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만여 명 이상으로 늘었다. 마닐라나 호치민시의 한인 수는 10만이 넘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동남아에 거주하는 일본인 수는 경제위기 이후 많이 줄어들었다.  정확한 수치를 댈 수는 없어도, 지금 동남아 11개국 중 일본사람이 한국사람보다 더 많은 나라는 싱가포르와 태국 둘밖에 없는 것 같다.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에서는 한국인이 외국인 거주민 중 최고로 많고, 앞서 언급한 나라들에서도 두세 번째를 다툰다.  관광이나 사업을 목적으로 동남아를 방문하는 한국인의 수도 매년 3백 만을 넘어 중국 방문객 수를 바짝 뒤쫓고 있다.  21세기 동남아에 나타난 하나의 현상은 다름 아닌 바로 코리아이다.

 

동남아 국가들 중 캄보디아에 나타난 코리아 현상은 현기증을 일으키게 할 정도다.  2000년에 고작 200명 정도에 불과하던 한국인 교민 수가 2003년에는 600, 2004년에는 800, 2007년에는 3,000, 그리고 올해는 4,000명으로 급증하였다.  8년 만에 20배로 늘었으니 가히 기하급수적이다. 외국인 방문객 중 한국인 비율은 2005년 이래 줄곧 1위이며, 작년에는 16.5%를 차지하였는데 2위인 일본인보다 무려 2배나 되었다. 이들 교민 중 1,500명이 조그만 관광도시 시엠리업에서 요식업과 관광업에 종사하고 있고, 방문객들 대부분이 이 도시는 꼭 거쳐가니, 시엠리업 속의 한국은 현상수준을 넘어 거의 기적에 가까워 보인다.

 

한국인 교민 및 방문객 수와 함께 한국인들의 경제활동도 급속히 증가하였다. 하지만 일인당 국내총생산이 500달러 정도에 불과한 이 나라 국민들의 구매력이라고는 보잘것없다 보니, 우리나라 상품들 중 인기 있는 소비제품은 기껏해야 중고 자동차, 헌 옷가지 등 중고 용품들이다.  그래서 우리 한국이 캄보디아에 눈독을 들이는 것은 무역보다도 투자 쪽이지만, 한국인 투자 중에서도 광산업과 유전 등 자원개발, 개발자금에 의존한 인프라 투자와 건설, 그리고 아직은 영세한 노동집약적 제조업 등에 그나마 투자다운 투자를 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역시 문제투성이 투자들이다.  게다가 이러한 정상적인 산업투자는 대체로 자본집약적이라 이 산업들이 수천 명의 한국인들을 흡인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캄보디아로 한국인들이 몰려드는 까닭은 말하자면 한국인들이 이곳에 몰려 들기 때문이다. 이 동어반복적 설명의 의미는, 한국인들이 지네들끼리 시장을 형성하고 장사를 하는 대신 현지인 사회나 경제와 연계가 강하지 않다는 말이다.  교민경제는 이런 배타성과 폐쇄성은 관광업과 부동산 투자(투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외국인을 상대로 한 관광은 캄보디아 경제의 가장 큰 외화수입원인 까닭에 국가의 정책적 지원을 받아 빠르게 성장하였다. 캄보디아의 관광객 유치전략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인구가 1 5백만도 안 되는 이 조그만 나라로 한국으로부터 운항하는 항공편 수가 주당 20편이 넘고 성수기가 되면 30편까지 증편을 한다. 불교도가 많은 지방의 도시에서도 직항이 있으니 지방사람들도 캄보디아 관광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캄보디아 관광 붐을 일으킨 주역은 여행사와 항공사들이었다.  처음에는 호치민시나 하노이만을 달랑 넣어 베트남 여행 상품을 만들어 팔아보니 반응이 영 신통찮았다. 그래서 베트남 관광에다 앙코르왓과 킬링필드로 대표되는 캄보디아 일정을 추가하였더니 대박을 터트린 히트상품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베트남-캄보디아 여행 패키지는 해외여행 상품들 중에 가장 가격이 싼 편이다.  많은 염가, 저가 여행상품들이 그러하듯, 항공료 정도밖에 안 되는 돈을 받은 국내 여행사들은 단 한 푼도 현지가이드에게 송금해 주지 않고 현지에서 필요한 모든 경비를 현지가이드가 알아서 조달하도록 맡기는 관행이 그대로 적용되는 데다, 항공료조차 박리다매에다 항공사끼리 경쟁을 하여 턱없이 낮게 책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앙코르라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유산이 핵심적 가치겠지만, 이를 상업화한 여행사와 항공사의 공로빼고는 동남아로 떠나는 한국인들 중 무려 10분의 1이나 흡인하는 캄보디아 관광을 설명하기가 힘들 것이다.

 

저가 경쟁에 발목 잡힌 한국인의 해외관광이 일으키는 갖가지 문제와 추태는 캄보디아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지만 이 글에서 굳이 그 실상을 일일이 그려 볼 생각은 없다. 여기서는 한국인 관광이 캄보디아 현지 한인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으로 크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통계가 정확한지 알 수 없지만, 캄보디아에는 한국인 가이드만 800여명이 있다고 하고, 대다수가 시엠리업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관광객들의 현지 경비를 조달하고 자신들의 돈을 벌기 위해 한국인이 소유하거나 경영하는 호텔, 식당, 여행사, 선물가게, 가라오케, 마사지업소 등으로 손님들을 안내해 주고 이른바 리베이트를 받는다. 게다가 이들 가이드들이 본국 여행사에서 송금해 오는 돈 한 푼 없이 관광객들을 받다 보니 돈을 미리 융통하는 일도 생기게 되고, 또 그러는 과정에서 고리 사채업자도 끼어 들고 조폭도 활약을 벌이고 그러다가 살인사건까지 나기도 했다.  이리저리 캄보디아에서 사는 대다수 교민들이 직간접적으로 한국인 관광과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다.

 

올해 3월 초 캄보디아에서 일고 있는 한국인 부동산 투자 붐을 국내언론이 특집기획을 통해 소상하게 소개한 적이 있다.  외국인이 소유하는 것이 불법인데도 불구하고 한국 떴다방과 투기꾼들은 캄보디아로 몰려 나가 땅을 현지인 이름으로 구입한 뒤 값을 올려 팔아 치우는 이른바 치고 빠지는투기 행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국제금융센터, 쇼핑센터, 호텔, 주상복합 아파트를 짓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큰 몫을 차지하지만, 부동산 투자가 얼마나 열기를 뿜고 있는지 2006년 이후 한국인에 대한 투자 승인액은 외국인 투자 부문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작년 실현된 한국인 투자액의 절반인 44천만달러가 부동산에 쏟아 부은 것이었다. 한국 사람들끼리 값을 올린 결과, 프놈펜 시내의 큰 도로변에는 평방미터당 3,000달러(평당 1,000만원)까지 하는 땅이 생겨 났다고 한다. 이를 두고 현지 한국인들은 한국인들끼리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캄보디아 교민사회의 기형적인 인구 구성은 600여 명에 달하는 선교사와 그 가족의 규모에서도 나타난다. 20년 가까이 계속된 공산통치 하에서 기성종교인 불교의 조직적 힘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훈시옌총리의 대외개방정책과 관광진흥책의 일환으로 선교활동의 자유를 보장된 덕분이지 몰라도, 캄보디아는 한국 교회들 사이에 동남아 선교를 위한 교두보로 떠 오르게 되었다. 역사 속에서는 동남아 최대의 불교 국가였고, 지금도 불교인구가 90% 이상을 차지하는 캄보디아가 한국인에게 해외 선교의 중심지로 부각되는 현상은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렵다.  반면 진정한 제조업 투자업체는 40여 개에 불과하다고 하니, 캄보디아 한인 사회는 여행 가이드, 선교사, 요식업자가 대다수를 구성하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교민사회가 형성된 것이다.

 

사실 원래 하고 싶었던 얘기는 훈시옌의 개발독재에 초점을 맞춰 캄보디아 현대사를 얘기해볼까 했는데, 캄보디아에 사는 한국 사람들 얘기만 잔뜩 하고 말았다.  난 동남아 속의 한국 이야기만 나오면 흥분을 감추지 못하니, 아무리 안 그런 척해도 나도 여지 없는 민족주의자인가 보다.  그래도 캄보디아 총리 훈시옌 개인사를 좀 이야기하고 오늘 이야기를 그냥 끝 맺을까 한다.  

 

훈시옌은 원래 킬링필드의 주역 크메르루즈 출신으로 1975 4민주캄푸치아의 승리 당시 크메르루즈군 장교로 복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8 8월 뽈 뽓을 필두로 한 핵심지도부가 동부지구(Eastern Zone)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자 베트남 국경을 넘어 탈주하였다.  같은 해 12월 베트남은 훈시옌과 같은 크메르루즈 탈주병들과 반군들을 모아 만든 군대를 앞세워 캄보디아를 침공하였고, 프놈펜 점령 후 새로 구성한 정부에서 그에게 외무부장관을 맡겼다.  1985년 훈시옌은 베트남 정부에 잘 보여 헹삼린(Heng Samrin)을 밀어내고 새 수상에 올랐는데 이 때 나이가 약관 33세였다. 그 후 8넌 간 훈시옌은 베트남의 강력한 후원과 물적 지원 아래 캄보디아의 재건과 안정에 주력하여 나름대로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는 미국과 중국과 같은 강대국들은 물론 국제연합조차도 크메르루즈가 주축이 되어 구성한 반군세력들의 연립 망명정부인 민주캄푸치아연립정부(Coalition Government of Democratic Kampuchea)를 지원하고 있었기에 훈시옌정부는 국제적으로 고립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훈시옌에 대한 서방언론의 태도나 그 정부의 업적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1993년에는 2년간의 유엔 임시 행정부(UNTAC)의 준비과정을 거쳐 평화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 총선에서 훈시옌이 이끄는 캄보디아인민당(Cambodian People’s Party)은 예상과 달리 왕당파 정당인 훈시펏(Funcipec)에 제1당 자리를 내 주고 만다. 바로 이 시점부터 훈시옌은 회유와 협박 등 온갖 수단과 권모술수를 동원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독점하는 독재자의 면모를 여지 없이 과시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가 지금까지 무려 23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권좌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권위주의적 통치 덕분만이라고 보기는 힘들고, 그 외에도 내전 종식을 통한 정치적 안정, 지속적인 경제성장, 정례적인 선거를 통한 정당화 등의 정치적, 경제적 성과가 혼란과 빈곤에 지친 캄보디아 국민들을 훈시옌의 지지자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1960-70년대 한국 정치를 장악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개발독재체제가 지금 캄보디아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993년 첫 총선에서 패배한 훈시옌은 몇 달을 끌며 훈시펏의 정부구성을 방해하다, 1당이 전체 의석의 3분의 2을 얻지 못하면 단독정부를 구성할 수 없다는 조항을 헌법에 집어 넣기에 이른다.  결국 제1, 2 당인 훈시펏과 캄보디아인민당이 일종의 거국내각을 구성하게 되고 훈시옌은 제2총리라는 희한한 자리를 만들어 차지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관료조직, 지방정부,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훈시옌이 정국을 주도하였고, 1총리인 라나릿왕자와 연립정부가 귀찮게 느껴지자, 1997년 라나릿의 외유를 틈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독차지하였다.  노골적인 부정선거는 아니었으나 자유롭지도 공정하지도 못했던 1998년 제2차 총선에서 훈시옌의 인민당은 드디어 훈시펏을 누르고 총선에서 승리하여 이번에는 제1여당이 되고 훈시옌 자신은 제1총리가 되었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정국을 완전히 장악한 훈시옌은 크메르루즈 잔재세력을 회유와 군사작전으로 완전 복속시켜 반세기에 걸친 내전을 종식시키고, 개방적인 대외경제정책과 시장경제체제 도입을 통해 경제발전에 힘을 쏟은 결과, 그의 권위주의 전횡에 대한 비판을 상쇄하는 대외신인도를 얻어 내는 데 성공하였다.  자신감을 얻은 훈시옌은 제2당인 훈시펏을 무력화시키고자 탄압을 가하고 내분을 책동하여 2003년 선거에서 제3당으로 전락시키는 한편, 자신의 캄보디아인민당을 절대과반수를 차지한 패권정당으로 등극시켰다.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훈시옌은 10여 년 전 자신이 강요하여 만들었던 거국내각 구성을 위한 3분의 2의석 획득 조항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조항을 없애고 과반의석 정당의 단독정부 구성을 허용하는 헌법개정을 추진하기 위해, 훈시옌은 2006 2월 자신의 협박에 생명의 위협을 느껴 해외 망명 중이던 제2당이자 유일야당의 당수인 삼 라인시(Sam Rainsy)에게 안전한 귀국을 보장하는 대가로 헌법개정에 동의해 줄 것을 제안하였다. 2006년에는 나름대로 대중적 기반을 가진 훈시펏에 거듭 내분을 조장하여 거의 완전하게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인민당에게 독자적인 정부 구성의 길을 헌법적으로 열어 놓은 훈시옌은 이번 달에 열리는 제4차 총선에서 압승을 기대하고 있으며 이 승리를 기반으로 더욱 강력한 철권을 휘두르지 않을까 예상한다.

 

훈시옌이 훈시펏과 삼라인시당에 대해 벌인 갖가지 책략과 조작(maneuvering)은 교묘하고도 끈질겨 제대로 된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아무튼 훈시옌은 정당정치 조작과 성공적인 경제발전을 동시에 추진해 온 성공적인 개발독재자로 보인다.  캄보디아 경제는 최근 3년 동안 연평균 11%가 넘는 성장률을 보이고 있으며, 외국인 투자와 수출은 꾸준히 늘어나고, 물가는 5% 미만으로 안정되어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개발독재의 원조 한국에 대한 훈시옌의 존경과 사랑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을 좋아했던 전 국왕 시하누크(Sihanouk)가 미워서 그런지 유달리 한국을 좋아하고, 1993년 이래 한국을 무려 네 차례나 방문했으며, 2000년에는 당시 이명박 전의원을 자신의 경제고문으로 초빙하기도 했다. 올해 2월 이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한 훈시옌 총리는 그 자리에 초청 받은 몇 안 되는 국가 정상 중의 한 사람이었다.  같은 개발독재자로서 과거 한국의 박대통령과 차이가 있다면 훈시옌 쪽이 좀 더 부패해 있고, 좀 더 거칠게 반대자들을 다룬다는 점이다. 1997 3월 훈시옌은 부하들을 시켜 자신을 비판하는 반정부시위대에 최루탄이 아닌 수류탄을 던져 19명의 목숨을 빼앗은 적이 있다.

by kevin | 2008/10/07 15:23 | 동남아 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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