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20일
영국 잠수함지휘관, 역사의 미궁에 빠지다
英潛艦指揮官潛進歷史迷宮
예양(葉揚)
亞洲週刊 22卷 32期, 2008년 8월 17일
영국의 전 잠수함지휘관 멘지스는 6년 전에 정화가 콜럼버스보다 72년 먼저 아메리카대륙에 도달하였다고 지적하여 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최근에 출간한 책 "1434"에서, 당시 중국 함대가 이탈리아에 가져온 예술, 지도, 지식 등이 유럽 문예부흥의 불길을 당겼다는 더욱 대담한 주장을 내놓았다.
영국의 전 해군 잠수함 지휘관 가빈 멘지스(Gavin Menzies)는 6년 전 "1421 : 중국이 세계를 발견한 해"라는 책에서 정화(鄭和)가 콜럼버스보다 먼저 아메리카대륙에 도착하였다고 지적하여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 금년 5월에 "1434 : 웅장한 중국함대가 이탈리아로 항해하여 와서 문예부흥을 점화하다"라는 새 책을 출간하여 지난 번 책의 기초 위에서 이탈리아의 문예부흥의 불꽃을 중국이 점화하였다고 지적하였다. 600년 전의 정화가 마침내 중국의 하나의 중요한 부호(符號)가 되었다.
2008년 7월 1일, 장쑤성(江蘇省) 타이창시(太倉市)의 정화(鄭和)주제공원에는 길이 71m, 너비 14.5m의 실물크기의 정화보물선 복제품이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이 배는 2008년도 중국항해일(中國航海日)의 분회장(分會場)이었으며, ‘정화 2호’로 불린다. 그 앞에 전시되어 있는 ‘정화 1호’도 항해일 당일에 그 풍채를 드러내었는데 이 배는 길이 16m, 너비 4m의 ‘소파로(小巴櫓)’로 크기는 비록 작지만 가장 먼저 전시된 것이다. 왜냐하면 타이완 민간 탐험가 쉬하이펑(徐海鵬)이 양안직항(兩岸直航)정책이 시행되기 전에 타이완 지룽(基隆)에서 직접 타이창항으로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한 차례 ‘정화의 8번째 서양 항해’를 준비하고 있다.
2008년에 ‘정화’라는 부호는 여전히 도전정신을 대표하며 중국항해일의 표지(標誌)이다. 그와 2만 8000명의 대원들은 일찍이 600년 전에 중국인의 시야를 넘어 육지문명에서 벗어나서 태평양, 인도양 혹은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깊은 대양으로 나아갔다.
정화의 이 탐험활동은 오래도록 중국사학계의 전문연구영역이었다. 그러나 2002년에 멘지스가 "1421 : 중국이 세계를 발견한 해"를 발표하여 아메리카대륙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콜럼버스가 아니라 정화이며 또한 그가 최초로 세계를 일주하였다고 제기한 이래, 전 세계는 정화와 관련된 수수께끼를 추적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심지어 한바탕의 논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논쟁은 2005년 정화가 서양으로 항해한 지 600주년이 되는 해에 절정에 다다랐다. 멘지스의 가설은 한때 동서양 매체들의 뜨거운 화제가 되었다. 2007년 중국당국이 칭다오(靑島)에서 중국항해일 기념식을 거행할 때 멘지스는 주요한 초빙강연자가 되었다.
중국의 많은 기념행사와 마찬가지로 600주년 기념일이 지난 뒤에 정화라는 화제는 점차 매체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 정화라는 이름은 멘지스의 생활에서 떠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는 또 한 바탕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2008년 5월 말, 멘지스는 홍콩에서 열린 신서(新書)발표회에서 "1434 : 웅장한 중국함대가 이탈리아로 항해하여 와서 문예부흥을 점화하다"라는 새로운 책을 내놓았다.
이 책은 "1421"의 주요 의문점인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과 관련된 지도를 보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1434년에 일단의 중국함대가 중국황제의 사절을 싣고 피렌체에 도착하였으며, 또한 교황 에우제니오(eugenius) 4세를 접견하였다고 지적하였다. 멘지스는, 당시의 접견에서 중국사절단은 중국의 예술, 천문지리(세계지도를 포함), 무기장비, 건축, 인쇄, 제련(製鍊) 등의 과학지식을 소개하였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 가지고 온 그 세계지도의 부본이 뒤에 콜럼버스와 마젤란의 수중으로 들어갔다고 하였으며, 이어서 두 선장이 세계지도를 보았음을 보여주는 문헌기록을 해석하여 그들은 단지 지도를 따라 신세계를 찾아갔을 뿐 ‘발견’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였다. 멘지스는 또, 중국사절단이 바친 물품과 문자, 도서 등 중국으로부터 온 과학기술지식이 교황 주변의 기록자들에 의해서 어떻게 기록되고 전사(傳寫)되었으며, 여러 해 뒤에 또 어떻게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유럽 문예부흥을 주도한 인물들의 시야에 들어가게 되었는가를 대담하게 서술하였다. 그는, 유럽의 문예부흥은 상당부분 그리스․로마정신으로의 회귀라고 볼 수 있지만 문예부흥의 불꽃을 점화한 것은 중국인이었다고 보고 있다.
‘콜럼버스 암호’가 아직 풀리지 않았는데 또 ‘다빈치 암호’가 나타났다. 이번은 진실인가 거짓인가? 속임수인가 오해인가? "1421"과 "1434"을 통하여 우리들은 동일한 문제에 대한 토론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이 토론이 갓 시작되었을 때 동양과 서양은 모두 역사적 사실에 대한 존중을 근거로 삼는 듯하였으나 우리들은 오히려 서로 다른 경향의 반응을 목도하였다. 이런 기이한 현상의 배후는 여러 가지가 한데 뒤섞여 있는 모순체이다. 그 속에는 2002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역사학에서의 논쟁, 일련의 경제활동, 일종의 존엄성에 관한 전쟁 및 가치비교와 관계된 정치적 음모가 포함되어 있다.
6년 전, 멘지스는 영국왕립지리학회 강당에서 정화 선단이 최초로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였다는 가설을 발표하였다. 나이가 적지 않고 행동은 빠르지 않으며 키도 크지 않고 목소리는 크지 않지만 담력은 적지 않은 이 아마추어 역사연구가는 유럽 600년의 영화를 잠깐 나타났다 사라져버린 동방제국 선단의 영향으로 귀결시킴으로써 세계 역사학계의 민감한 신경을 건드렸다.
왕립지리학회가 제공한 자료에 의하면, 멘지스의 강연은 텔레비전을 통하여 전 세계 10억의 인구가 시청하였다고 한다. 그의 이론은 즉각 뉴욕 타임즈를 포함한 영문 매체의 제1 면을 차지하였으며 또한 매우 빠른 속도로 중문매체에 크게 보도되거나 전재되어, 순식간에 서방평론계에 세계역사를 수정해야하는가라는 문제에 관한 토론을 야기하였으며, 아울러 최근 중국학계에서 불고 있던 ‘정화 연구열풍’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멘지스의 저작 "1421 : 중국이 아메리카를 발견한 해"(나중에 1421 : 중국이 세계를 발견한 해로 수정됨)의 영문판은 600쪽에 달하며, 하나의 벽돌과 흡사하다. 즉 그것은 확실히 마치 서양 영웅의 얼굴에 던진 벽돌과 같았다. 그것은 지도(地圖)의 비교대조, 해양지식, 천문도항(天文導航, 천문을 이용한 항해술), 조선기술, 역사문헌, 출토문물, 언어학, 풍속학, 건축학, 생물학, 인류학 등의 논거를 이용하여 이러 놀라운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 결론은 바로 콜럼버스와 바스코 다 가마 등의 유럽 항해가들은 모두 지도를 갖고 출항하였으며, 그들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지도상에 이미 존재하던 육지를 찾아간 것이고, 중국의 정화 선단은 1421년 이전에 이미 먼저 아메리카에 도착하였고 심지어는 세계일주항해를 하였다는 것이다.
2002년 10월에 멘지스는 난징(南京)에서 개최된 정화 항해 600주년 기념학술토론회에 참석하여 처음으로 중국학자들에게 자신의 가설을 소개하고 중국 역사학들의 근엄한 학문연구와 세심한 고증적 전통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들은 이들 지도와 문자기록의 원본이 어디에 있는가, 믿을만한 것인가, 그것들이 중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는가, 물건의 유사성만으로 증거를 삼는 것이 지나친 견강부회는 아닌가 하는 점들에 대하여 분분히 질문을 던졌다. 중국의 역사연구가 문헌기록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멘지스는 항상 “당신의 이 말의 출처는 어디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곤 하였다. 이럴 때마다 멘지스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책이름뿐이었으며 전문가처럼 어느 책 몇 쪽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는 멘지스에게 자괴감을 느끼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를 곤혹스럽게 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정화의 항해자료 대부분이 정치투쟁 때문에 폐기되었음을 인정하고 있는데 왜 중국학자들은 현존하는 중국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지역에는 정화가 가지 않았다고 고집하느냐고 말하였다.
사실 일찍이 멘지스의 가설이 막 나오기 전에 중국사회과학원 과학사연구소의 쑹정하이(宋正海)는 이미 정화가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였거나 오스트레일리아에 도달하였을 가능성을 인정하였으며, 또한 정화가 아메리카대륙에 도달하고 세계를 일주하였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론적으로 부정하였으나 동시에 그의 분대(分隊)가 아메리카대륙에 도달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당시 멘지스의 책이 아직 출판되지 않고 중국학계가 여전히 관망하고 있던 상태에서 쑹정하이는 민첩하게 “단지 우리가 역사유물주의를 믿고 기존의 연구가 진지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수동적으로 기다릴 필요없이 적극적으로 진지하게 반성하고 체계적으로 기존의 연구성과를 검토하여 주도적으로 대담하게 자신의 연구결과를 수정해야 한다. 이 글은 바로 이러한 반성의 초보적인 결과이며, 지금 이 글을 발표하는 목적은 멘지스의 새로운 이론이 일으킬 수 있는 학술논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데 있다.”라고 지적하였다.
과연 학술논쟁이 발생하였으나 안타깝게도 학계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중국어를 할 줄 모르며 중국의 고대한어(古代漢語)는 더욱 알지 못하는 멘지스는 중국사학계의 많은 전문가가 보기에는 여전히 연구능력이 미달되고 대화할 자격이 갖추어지지 않은 문외한이었다. 그들은, 멘지스가 말하는 지도, 침몰선, 유전자 및 천문도항(天文導航) 등의 증거는 모두 ‘실체’가 없는 가설 혹은 추리이며, 이러한 방식으로 소설을 쓸 수는 있지만 학문을 하기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중국 런민대학(人民大學)에서 역사지리를 전공하는 화린푸(華林甫) 교수는, “추측이 사실을 대체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는 멘지스에게 이런 연구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하면서 “명대(明代)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정화를 연구하는 것보다 훨씬 의의가 크다.”고 건의하였다. 멘지스는 중국 매체에 글을 발표할 때마다 거의 예외없이 중국으로부터의 비판적인 시각에 의해 반복적으로 검토되거나 혹은 중국사학계에 의해 공개적으로 ‘타도’되었다.
중국학계와 외국학계의 반응은 전혀 다르다
중국과는 대조적으로 서방의 반응은 대체로 비교적 긍정적이었다. 2005년 5월 미국국회도서관 아시아관에서 열린 연구토론회에서는 100여 명의 학자들이 멘지스의 강연을 듣고, 각자 인류학, 생물학, 건축학 등 다각도에서 중국인이 가장 먼저 아메리카대륙에 도달하였음을 논증한 성과를 교환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중국인이 가장 먼저 오스트레일리아에 도달하였다는 사실을 지지하는 학자가 많이 있다. 2006년 5월 멘지스는 멜버른대학에 초청되어 강연을 한 뒤에 표창장까지 받았으며 그 후 시드니와 오클랜드 국립해양박물관의 주선으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페루, 칠레, 브라질 등의 국가에서 강연을 하였다. 동남아 국가의 역사학자들도 대체로 멘지스의 가설을 지지하면서 그가 제시한 증거들이 설득력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싱가포르에 본부를 두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까지 학술활동을 벌이고 있는 국제정화협회(國際鄭和協會)는 여러 차례 멘지스의 이론에 지지를 나타내었다. 홍콩에서는 다수의 홍콩왕립지리학회회원들이, 멘지스의 가설이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는 그가 오랜 시간 동안 현장을 조사하여 대량의 증거들을 수집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그것이 공허한 상상에서 도출된 결론은 아니라고 하였다.
멘지스가 거의 20년 동안 자비를 들여 연구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연구방법은 문헌학적 방법만이 아니었다. 그밖에도 그는 자신이 해군에 복역하던 시기에 받았던 항해와 천문도항((天文導航)지식을 결합하여 현장을 조사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들였다. 그는 근 900개의 박물관과 중세의 모든 주요항구를 찾아 120개국을 다녔다. 그밖에 그는 또 인터넷을 통하여 증거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이들 자료를 모아두는 웹사이트를 개설하였다. 완전히 개방된 이 자료창고는 전 세계 누리꾼들을 민간역사연구자로 만들었다. 어떤 사람이든 전자우편을 통하여 자신의 연구 심득(心得)을 교류하거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그의 「1421웹사이트」에는 월평균 10만 명이 방문하며 회원은 1만 6천 명에 달한다. 각종 증거자료는 모두 2000여 쪽에 이르고 있다. 멘지스는, 이들 증거자료의 양은 놀랄 정도로 많아서 분석하고 정리하는데 많은 노력이 들기 때문에 단지 인터넷에 올려놓아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안타깝게도 이런 방식으로 멘지스가 생각하는 목표를 달성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는 중국어를 모르며, 중국대륙의 대다수 역사학자은 영어실력이 매우 낮아서 영어 사료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결국은 서로가 자신의 이야기만을 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으며, 아직까지 이 자료의 교량을 왕래하는 차량은 없다. 여기에만 그치지 않고, 많은 역사학자의 눈에는 웹사이트를 이용하여 공개적으로 이른바 역사적 증거들을 수집하고 발표하는 것은, 인터넷상의 자료의 신뢰도가 매우 낮다는 것을 고려할 때 매우 신중하지 못하고 책임없는 태도라고 여기고 있다. 인터넷에서 중국어와 영어로 지지자와 비판자들이 서로 얽혀서 소리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수많은 전자우편과 논문들이 매우 빠른 속도로 왕래하는데 그중에는 베이징의 변호사 류강(劉剛)의 것도 포함되어 있다.
2006년 1월과 3월에 멘지스는 계속하여 두 번이나 중국변호사 류강의 협조를 얻어 1763년에 모사한 것으로 알려진 1418년 세계지도와 그 지도 견본의 탄소연대 측정자료를 발표하였다. 류강이 소장하고 있는 이 「천하제번식공도(天下諸番識貢圖)」는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와 BBC 등 주류 영문매체에 보도된 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하였으며 중국 본토에서도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몇몇 구미 역사학자들은 이 지도가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였으나 일부 중국 역사학자들은 글을 써서 이 지도가 위조된 것이라고 지적하여 쌍방이 인터넷상에서 서로 공방을 주고받았다. 싱가포르국립대학 아시아연구소의 제프 웨이드(Geoff Wade) 연구원은 전문적으로 웹사이트까지 개설하여 멘지스의 주장을 반박하였으며, 아울러 중국매체에 실린 궁잉옌(龔纓晏), 저우전허(周振鶴), 진궈핑(金國平) 등 학자들의 논박문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웹사이트에 올렸다. 미국학자 톰슨, 캐나다 학자 왕다펑(王大鵬), 멘지스, 류강도 글을 써서 공개적으로 응대하거나 논증하였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논거를 비판하였는데, 예를 들면 중국인이 명대(明代)에 세계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중국인이 명대에 경도(經度)의 계산방식을 알았는지, 명대에 간체자 ‘여(余)’자를 사용하였는지, 일부 지명이 잘못 표기된 원인이 무엇인지 등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지적하고 있다. 일반 민간인은 학술논증에 있어서는 확실히 열세이지만 이는 중국의 일반 민간인이 이 주제에 관하여 관방(官方) 역사학자에게 처음으로 도전한 것이었다.
2006년 6월에 멘지스는 홍콩으로 가서 일련의 강연활동을 벌였는데, 일정 가운데 한 차례의 기자회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기자회견 석상에서 미국 국적의 중국인 생물학자인 리자오량(李兆良) 박사는, 그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작은 도시 스완나노아(Swannanoa)에서 출토된 명대 선덕(宣德) 연간의 금패(金牌)를 가지고 있는데, 윗면에 ‘대명선덕위사(大明宣德委賜)’라고 쓰여 있으며 이는 특수한 외교적 기능을 하였던 물건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 금속성분의 분석, 출토지역 인디언의 역사적 변천, 도자공예, 특수한 깃발과 언어대비 등의 방면에서 제기된 기타 보충증거들을 통하여 이것이 정화선단이 제7차 서양항해에서 아메리카에 도착하였다는 유력한 증거라고 추정하였다. 멘지스와 리자오량은 함께 홍콩왕립지리학회의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하였다.
멘지스의 이론은 해양과학에 부합한다
리자오량 박사의 견해 역시 중국역사학자들로부터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여겨졌다. 어떤 사람은 이 금패가 가짜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윗면에 쓰인 것이 분명히 ‘대명선덕위제(大明宣德委製)’라고 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이들 보충증거들은 모두 인디언이 스스로 발전시켜온 문화이며 정화와는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 홍콩시립대학의 정페이카이(鄭培凱) 교수는 그의 이 오랜 친구에게 의미심장하게, “당신은 왜 먼저 우리 역사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와서 묻지 않았나? 내가 만약 생물화학상의 발견을 한다면 먼저 당신처럼 전문적으로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가서 물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또, ‘일부 사람들은 일생동안 정화의 항해를 연구하며, 일부 사람들은 조용하고 꾸준히 학문을 연구한다. 그런데 멘지스는 실제적인 증거를 하나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 뜻밖에 여기저기서 마음대로 떠들고 다닌다.’고 하였다. 이 시점에서 이 논쟁은 학술연구의 방법의 차원을 넘어 학술의 존엄성에 대한 논쟁으로 바뀌었다.
로얄홍콩요트클럽의 한 만찬석상에서 몇몇 서양인 선장들은, ‘바다가 위험하기 때문에 배를 지휘하는 사람은 종종 여러 사람들이 가장 신임하는 자이다. 멘지스의 역사연구수준에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그의 성실함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또, ‘멘지스의 이론은 해양과학에 부합한다. 왜냐하면 그는 계절풍과 해류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바다에서 범선을 운행하는 원리를 알고 있으며, 더욱이 천문도항(天文導航)과 배를 운행하는 사람이 파악하는 방향과의 관계를 알고 있다. 멘지스 자신이 핵잠수함의 지휘관이었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또 중국학자들을 매몰차게 조롱하여, ‘그들이 만약 바다에 나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른다면 어떻게 항해가가 바다에 나간 뒤의 일을 연구할 자격이 있는가?’라고 하였다. 아마도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많은 선장들이 멘지스의 충실한 독자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거기에는 유명한 스웨덴의 복제 고(古) 범선 ‘예테보리(Goteborg)’호의 현임 선장인 피터도 포함되어 있다.
인터넷에 다수의 글을 발표한 학자인 위궈(余果)는 전에 「멘지스, 당신의 침몰선은?」이라는 제목으로 멘지스가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솔직히 말하면 확실히 멘지스는 한 척의 침몰선도 인양하지 못하였고, 정화 선단의 대원이 아메리카에 남았다는 유전자연구보고도 제시하지 못하였으며, 아메리카의 어떤 곳에서도 중국문명과 비슷한 유지가 남아 있음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동시에 그는 지금까지 유럽고대지도와 관련된 의문에 대하여 설득력을 가진 원본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가 류강이 보관하고 있던 지도와 리자오량이 가지고 있던 선덕금패(宣德金牌)를 새로운 유력한 논거로 제시할 때, 많은 사람들은, 이들 증거가 멘지스의 이론과 ‘너무나 잘 부합한다.’는 사실은 바로 그들이 멘지스와 모종의 연락을 취하면서 위조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멘지스는, 그가 이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발작할 뻔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는 이러한 이야기들에 굴복하지 않고 2007년에 한 차례 자금을 마련하여 미국 오레곤주 해안과 플로리다주로 가서 중국 침몰선의 잔해가 발견되었다는 지역에서 침몰선을 인양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하여 해안을 스케치하고 위치를 확정하고 나무잔해의 견본을 채취하고 나자 이미 자금이 바닥나 버렸다. 같은 해에 그가 펑황(鳳凰)위성텔레비전과 협상한 ‘중국인, 아메리카를 발견하다’라는 탐사프로그램도 너무나 방대한 자금이 소요된다는 것을 쌍방이 확인한 뒤에 부득이 보류하였다.
침몰선을 인양하고, 유전자를 검사하며, 골동품을 수집하고 감정하는 일은 모두 비용이 많이 들어가므로 퇴역노인인 멘지스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학술적으로 권위 있는 사람들이 이 아마추어 작가를 포위하고 또 그에게 모든 증거들을 찾아내고 모든 해답을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기대이며 심지어는 불가능한 일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리고 멘지스가 이들 증거들을 제시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그의 결론이 잘못되었다고 추단하고, 그가 수준 이하라고 조소하고, 그의 인격이 천박하다고 비판한다면, 오히려 이들 학자들의 학술토론정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의심스럽다.
대다수의 중국학자들이 결코 멘지스의 가설을 맹렬히 공격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그들이 그의 이론에 찬성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 시간을 들여 이 이론을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멘지스의 저작 ������1421������의 중문간체판이 출간됨에 따라 더욱 많은 중국학자들이 멘지스의 가설에 대하여 이성적인 분석을 하게 되었다. 중국 윈난대학(雲南大學) 역사학과는 가장 먼저 멘지스의 이론에 대하여 연구를 진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평생 정화를 연구하고 평생 고문서를 뒤적이던 사람들이다. 2004년 7월에 멘지스가 참석한 한 연구토론회에서 이 학과의 노교수인 주후이룽(朱會容)은 일찍이, “정화 항해도(航海圖)에는 모두 500여 개의 지명이 나오는데, 현재는 단지 300여 개만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들이 평생 동안 연구를 하였지만 사실 정화의 항해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매우 불충분하다. 멘지스선생의 연구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계시를 주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은 이와 달라서 그들의 반응은 신속하고 감성적이다. 멘지스의 학설이 알려진 지 겨우 3일 뒤에 영국의 누리꾼을 대상으로 한 어떤 조사에서는, 49%의 누리꾼은 멘지스의 관점이 중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6%의 누리꾼은 그의 증거가 부족하다고 하였고, 3%는 그의 관점이 토론할 가치가 없다고 하였으며, 또 다른 3%는 앞의 어느 관점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정화의 서양항해 600주년 때 시나닷컴(sina.com)의 독서채널에서 멘지스의 책에 대하여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긍정적인 의사를 표시한 누리꾼이 85%에 달하였다.
멘지스의 가설은 일부 중국인들의 왕성한 민족자존심에 불길을 당겼다. 그들이 보기에 이 부분의 역사는 진실된 역사상에 대한 탐색이라기보다는 민족적 존엄으로의 회귀이다. 그들은, 인터넷에 비판의 글을 발표하는 중국학자들을 대대적으로 비난하면서, 이들 학자들은 모두 시야가 좁고 맹목적으로 옛 것을 고수하여 자신의 학술적 권위를 한 외국인에게 빼앗겼다고 걱정하고 있다. 두 번째 의견은 정화가 최초로 아메리카대륙에 도달하였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탐색 자체를 반대하고 있다. 그들은 정화가 최초로 도달하였더라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는 현지 사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아메리카의 역사를 바꾼 것은 여전히 콜럼버스이며 유럽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은 정말로 어리석고 무료하다고 하였다. 세 번째 의견은 주로 류강과 멘지스라는 인물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들은, 그들이 내세우는 이른바 증거라는 것은 바로 거짓임을 알 수 있으며, 그들은 돈을 위하여 세상을 속이고 명성을 훔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네 번째는 멘지스의 연구는 그 내용이 충실하며 현재는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계속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견해이다.
현재 멘지스의 "1434"가 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으나 여전히 "1421"의 논리선상에 있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일부 비평가들은 여전히 책을 살 필요도 없이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한 마디 말을 준비하고 있다. 즉 “그는 잘못된 길 위에서 갈수로 멀리 나아가고 있다.”라고. 역사의 해양에서 멘지스는 진실을 밝히기 위하여 부지런히 노력하며 미궁을 뚫고 나가 진실의 피안을 찾으려 하고 있다
# by | 2008/10/20 16:55 | 동아시아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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